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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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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2015년 11월 29일 18시 13분  조회:5890  추천:1  작성자: 넉두리

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번역)


 
 
만약 세계에서 어느 황제의 릉묘를 파헤치기 가장 어려운가고 묻는다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무측천의 “만년수역(万年寿域)—건릉(乾陵)”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일것이다. 무측천의 릉묘는 랭병기(冷兵器)시대의 도검(刀剑)에도 시달렸고 열병기(热兵器)시대의 기관총과 대포의 세례도 받았다. 1300여년을 거치면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던 도굴범(盗墓贼)중 이름이 있는 자만 해도 17명이상이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무제의 무릉(茂陵)이 도굴당해 텅비였고 당태종의 소릉(昭陵)도 모두 파헤쳐졌다. 강희황제의 릉묘는 더 험하게 당해 뼈마저 완정하게 보존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서 유독 무측천의 건릉만이 완정하게 보존되였을가?

이 일은 건릉을 수건할 때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건릉은 기원 684년에 수건하기 시작하여 23년만에 공사가 기본상 완공되였다. 건릉은 섬서성 건현성 북쪽 6킬로메터 되는 량산에 자리잡고있는데 서안과 76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량산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암질의 산봉이다.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최고봉인 북봉은 해발 1047.3메터이다. 동서가 서로 마주서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내두산(奶头山)”이라고 불렀다. 건릉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량산은 녀성이 반듯이 누워있는 형상인데 북봉은 머리같고 남이봉은 가슴같다. 사람들은 이를 녀황제 무측천을 상징하는 절묘한 형상이라고 말했다.
당나라의 풍수선생은 량산이 녀주인에게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때문에 무측천은 량산을 당고종과 자신이 죽은후에 누워있을 “만년수성”으로 선택했다.

건릉을 수건할 때는 당나라가 흥했고 국력이 강했기때문에 릉원규모가 방대했고 건축이 웅위롭고 아름다와 “력대황제의 릉묘중 최고”라고 불리웠다. 당조초기에 당태종 리세민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없었다는 력사교훈을 받아들여 그와 장손황후의 소릉(昭陵)부터 시작하여 “인산위릉(因山为陵)”의 장례제도를 내왔다. 당시의 저명한 예술대사 염립덕, 염립본 형제가 건축군과 조각군을 결합하여 설계한 릉원이 끝없이 이어진 산우에 기복을 이루며 놓여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룡이 누워있고 봉황새가 날아오르는듯한 형상이다.

당고종과 무측천의 건릉(乾陵)은 점차 소릉(昭陵)의 모양을 갖추었다. 당조의 도읍 장안의 격식으로 건설된 릉원은 황성(皇城), 궁성(宫城), 외곽성(外郭城)으로 나늬였는데 남북주축선은 4.9킬로메터에 달한다.

다년간의 탐측과 고찰을 거쳐 릉원안의 보물은 적어도 500톤에 달할것으로 문물전문가가 예측했다. 전후통로의 량측에 각각 4개의 석굴이 있는데 석굴안에는 당조흥성시기의 가장 가치있는 보물이 가득 차있다. 금강벽으로 통해있는 근 100메터되는 통로량측에는 각종 금은제기(金银祭器)가 빼곡이 배렬되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흥미를 끄는것은 최상급 국보(国宝)인 “란정서(兰亭序)”이다. 건릉일대의 민간에는 일찍 “란정서”가 무측천의 묘지에 묻혀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상습도굴범, 변경을 지키는 총독, 토비, 군벌 심지어 농민봉기군까지 건릉에 수많은 금은보화가 묻혀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삽과 괭이로 묘지를 파혜쳤다. 무측천이 건릉에 누워있은 시각부터 량산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제일 처음 건릉을 찾아온것은 당조말기의 반란대군 령수 황소였다. 이 소금장사군은 60만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을 공격한후 한바탕 통쾌하게 불사르고 략탈하는것으로 토비근성을 만족시키고 나서 갑자기 할일이 없는것을 발견했다. 이때 누군가 량산의 서측황토지하에 대량의 자갈이 매장되여있다고 아뢰였다. 이 소식은 당릉중 가장 부유한 건릉의 입구가 량산의 서측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것을 암시했다. 황소는 크게 기뻐서 즉시 40만병사들을 동원하여 량산에 올라 서측부터 파헤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였기에 삽과 괭이를 쓰는 솜씨가 매우 능숙했다. 얼마 안되여 절반의 량산을 파헤쳐 40메터 깊이의 “황소도랑”을 남겼지만 건릉의 입구를 찾지 못했다.

그후 당왕조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황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도망쳤다. 자칭 서생이라고 우쭐댔던 황소는 우둔하기 그지없어 건릉이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당조황제는 고의적으로 시공할 때 생긴 자갈을 릉원에서 300여메터밖에 있는 곳에 매장했다. 때문에 황소는 속임수에 들어 다른 방향으로 파헤쳤던것이다.

건릉에 죄악의 손을 뻗친 두번째 인물은 5대시기의 요주절도사 온도였다. 온도는 당왕조의 황제릉묘를 파헤치려고 태여난것 같았다. 그는 건릉전에 이미 17개의 당나라의 황제릉묘를 파헤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리상은 파멸되였다. 그는 황소처럼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시퍼런 대낮에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 폭우가 내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날이 개이군 했다. 이렇게 세번이나 반복되자 온도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노한것이라고 생각되여 다시는 건릉을 파헤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두번째로 재난을 면했다.

가장 위험한것은 세번째였다. 세번째로 출동한것은 40만대군보다 더 강한 현대화로 재편성한 한개 사였다. 또한 도구도 삽과 괭이가 아니라 바위도 가를수 있는 기관총과 대포였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출동한 도굴주범은 바로 민국시기의 국민당 장군 손련중(孙连仲)이였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량산에 오른 손련중은 손전영(孙殿英)이 자희태후와 건륭황제묘를 폭발시킨것을 본받아서 군사훈련을 한다는 명의로 작탄을 묻어 건릉을 폭발시켜려고 했다. 그러나 폭발준비를 하고있을 때 갑자기 검은 연기같은것이 몰려와 룡권풍을 이루더니 흙먼지가 휘몰아쳐 삽시에 온천지가 어두컴컴해졌다. 돌이 굴러떨어지고 모래가 날려 섬서성에서 온 7명의 병사가 당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그 바람에 다른 병사들은 목숨을 구하겠다고 산아래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마지막 재난을 면하게 되였다.

건릉은 당조의 제3대 황제인 고종 리치와 그의 황후 무측천을 합장한 묘이다. 건릉릉원의 주작문(朱雀门)밖의 동서량측에는 61존석인상(61尊石人像)이 분포되여있다. 61존석인상의 크기는 1.50~1.77메터로서 진짜사람과 비슷한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번상(蕃像)” 또는 “빈왕상(宾王像)”이라고 부른다.

건릉에 현존하는 번신상은 모두 61존인데 동쪽에 29존이 있고 서쪽에 32존이 있다. 이렇게 대칭되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번신상이 모두 61존만이 아닐것이라고 의심했다. 과연 연구일군들은 건등의 동쪽릉원구에서 높이가 2.45메터이고 너비가 0.86메터인 미완성석재를 발견했다. 후에 또 그쪽에서 사람형태가 형성된 다른 하나의 반제품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부근의 촌민들이 미완성석상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하여 학자들은 건릉의 번신상이 원래는 64존이였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건릉의 번신상은 명조중후기에 엄중하게 파손되여 대부분 머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본세기초에 모든 번신상의 머리가 사라졌다.
명조 가정(嘉靖) 34년(기원 1555년 1월 23일)에 섬서성 화현일대에서 8~11급의 강렬한 지진이 발생되였다. 사람들이 달콤하게 잠을 자고있던 밤중에 지진이 일어났기때문에 그번 지진에 80여만명이 사망되였다. 화현은 건릉에서 100여킬로메터밖에 안되여 진중지대(震中地带)에 속했기에 건릉은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것이 력사상 저명한 관중대지진(关中大地震)이다.

전문가들은 관중대지진이 번신상(番臣像)의 머리를  끊어지게 한 원인중의 하나라고 단정했다. 번신상뿐만아니라 건릉의 많은 석상석마가 훼손된 부분도 모두 머리부분이였기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석상의 경부가  취약한 외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석상의 재질(材质)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각에 채용된 석료(石料)에는 일부 흠이 있었다. 즉 석료에서 일부 옅은색의 선을 볼수 있었다. 돌이 손상을 받을 때 이런 곳이 가장 쉽게 갈라지게 된다.

연구일군의 판단에 의하면 61존번신상(尊番臣像)의 일부분이 그번 관중대지진에 훼손되였다. 나머지 석상은 500~600년전의 명조말기에 발생된 여러차례의 전쟁에서 훼손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이 61존번신상의 머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수 없지만 소매폭이 몸에 딱붙는 옷, 너른 허리띠, 짧은 가죽신, 두발이 마치 살아있는것처럼 생생한 형상은 마치 조정에서 번신(蕃臣)들이 시립하고있는 정경을 보는듯 하다. 이런 정경은 우리에게 당나라의 태평성세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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